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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투맨] 25년 전, 마이클 조던이 “I"m Back”을 외치지 않았다면?

작성일 20-03-24 15:35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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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마이클 조던 복귀 후 NBA는 많은 역사를 새롭게 썼다. 비록 복귀 시즌에는 우승을 거두지 못했지만 이후 3시즌간 역대 최다승(72승)을 비롯해 많은 기록을 세웠고 이를 토대로 NBA의 흥행은 물론이고 선수들의 위상도 많이 달라졌다.

반대로 돋보이는 존재감으로 인해 눈물을 흘린 이들도 존재했다. 조던 복귀 칼럼을 준비하다가 쓸데없이 진지한 가정 하나를 해보았다.

‘만약’ 조던이 그대로 농구계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떤 것이 달라졌을지 당시 상황을 토대로 상상해 보았다.


연봉 기록

마이클 조던은 1988년 9월 시카고와 2,500만 달러 규모의 8년 계약을 맺었다. 그 시절만 해도 정말 파격적인 대우였다. 게다가 이 계약은 조던이 따로 부탁도 안 했는데, 구단 차원에서 고맙다며 해준 계약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던의 연봉 규모는 리그에서도 평범한 수준이 된다. 72승을 거둔 1995-1996시즌 연봉이 385만 달러였고, 그보다 많이 버는 선수가 27명이나 있었다. 이 시즌 패트릭 유잉(뉴욕 닉스) 연봉은 무려 1,872만 달러였다.

조던이 합류한 뒤 시카고 성적, 티켓 판매, 중계권, 관련 상품 판매, 광고 및 후원 계약 등 구단이 조던으로부터 얻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무료 봉사’ 수준이었다.

어디까지나 ‘돈은 다른데서 더 벌 수 있다’는 조던의 마인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1996년 자유계약선수가 된 조던은 더 이상 금액을 양보하지 않았다.

본인이 곧 ‘시장(market)’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페이컷이 생겨나긴 했지만, 대부분 NBA 선배들은 첫 고액연봉 계약을 맺은 후배들에게 “네가 네 길을 잘 닦아야 한다”고 말을 한다. 나쁜 선례를 만들지 말라는 의미다. 네가 네 가치를 잘 챙겨야 후배들도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기도 하다. 조던 역시 이번 만큼은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대접받고자 했고 당시로 따지면 천문학적인 액수였지만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조던은 1996-1997시즌을 앞두고 1년 계약을 체결하는데 연봉이 무려 3,300만 달러였다. 당시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한 액수로 《ESPN》은 “요즘 기준으로 따진다면 5,000만 달러 규모일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1996년은 NBA 선수 평균 연봉이 212만 달러였던 시대였고, 리그 샐러리캡이 1,822만 달러였다. 또, 2019-2020시즌 최고 연봉선수가 스테픈 커리(4,023만 달러)였고 전체 연봉 10위가 폴 조지(3,300만 달러)이니 20년 전에 그 액수만 그야말로 전례가 없는 금액이었음을 알 수 있다. (24페이지에 이르는 조던의 시즌 계약서는 2014년, 경매에 올라 3,800만원에 팔렸다.)

조던 이후 가장 먼저 3,000만 달러 고지를 밟은 선수는 2012-2013시즌의 코비 브라이언트(3,045만 달러)였다. 만일 조던이 아니었다면 연봉 기록 3,000만 달러 고지는 한참 뒤에야 깨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스카티 피펜의 위상

최근 젊은 독자분들이 보내주는 메세지, 혹은 NBA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글 중에는 스카티 피펜에 대한 감탄 섞인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피펜의 풀 경기를 처음 봤는데, (경기 내) 영향력이 어마어마한 것 같다”며 말이다. 아마도 《SPOTV》에서 클래식 경기를 방영해준 덕분일 거라 생각하는데 실제로 피펜은 1993-1994시즌에 조던 없이도 시카고를 55승으로 이끌었고, 정규시즌 MVP 투표 3위(1위는 하킴 올라주원), 올스타 MVP, 올-NBA 퍼스트팀과 디펜시브 퍼스트팀에 이름을 올리며 선수 개인으로서는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그러나 유독 시카고 구단은 그 진가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여러 신문 기사와 당시 단행본을 살펴보면 ‘기량’보다는 ‘사람’으로서 서로 신뢰가 깨진 탓이 컸다. 그래서 피펜은 지속적으로 트레이드와 계약 갱신 요구했고, 구단도 끊임없이 이를 외면했다.

여러 트레이드 루머가 언급됐다. 대표적으로 1993-1994시즌에는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숀 켐프, 1994-1995시즌에는 피닉스 선즈의 댄 말리가 트레이드 조건으로 거론됐다. 둘 다 피펜은 ‘쇼크’로 받아들였고 기분 나빠했다. 반면 받아들이는 쪽(시애틀의 조지 칼 감독, 피닉스의 찰스 바클리)은 피펜을 반겼지만 말이다. 피펜을 원한 팀은 필라델피아 76ers, LA 클리퍼스 등 무려 11팀이었다.

조던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피펜은 머지 않아 트레이드 되었을 것이다. 스스로 언론 인터뷰 보이콧까지 하면서 그의 편도 많지 않았으며, 팀에서도 불평분자로 찍혀 위상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본인이 해야 할 일을 해내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코트 밖에서는 ‘통제 불능’ 이미지가 강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게 됐는지는 이해가 갔지만 말이다.

이미 만들어진 역사에서 "만약"이란 참 부질없는 일이지만, 만약에 그가 시애틀로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조지 칼 감독의 시애틀은 그 시기 서부 최고의 수비팀 중 하나였다. 정통 센터없이도 실점 6위(1993-1994시즌)를 기록하며 63승 19패로 전체 승률 1위를 기록했다. 아쉽게도 플레이오프에서는 8번 시드 덴버 너게츠의 희생양으로 남게 됐지만, 플레이오프가 시작될 때만 해도 유력한 우승후보로 꼽히기도 했다.

만일 스카티 피펜-게리 페이튼 올-디펜시브 팀 라인업이 생겼다면 어땠을까. 여기에 스틸 1위 네이트 맥말린과 켄달 길(혹은 허시 호킨스)까지 있었다면 상대 백코트 입장에서는 악몽, 그 자체였을 것이다. 다만 우승까지는 어려웠을 것이다. 피펜을 받고 켐프를 내주었다면 그나마 있던 장신 핵심선수가 없어졌을 테니 말이다.

피닉스는 피펜을 받고 ‘썬더’ 댄 말리를 주는 계획을 세웠다. 제리 크라우스(작고) 단장이 생각하기에 말리가 더 수비가 좋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8-1999시즌에 확인됐듯 바클리와 피펜은 센터 유무와 관계없이 플레이 스타일이 너무 안 맞았다. 게다가 1990년대 중반은 바클리도 몸이 아주 나쁘진 않았기에 본인이 ‘원하는 만큼’ 백다운 공격을 시도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피펜이 이적했더라도 우승까지 갔을 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그러나 늘 ‘배트맨과 로빈’에서 ‘로빈’에 머물렀던 피펜이었기에 ‘전성기’에 다른 팀에서 본인이 주축이 되었다면, 혹은 시카고에서라도 좀 더 대접받으면서 에이스 역할을 했다면 위상이 어떻게 달라졌을 지 궁금하다.

한편, 1994년에 필 잭슨 감독은 필라델피아에서 뛰던 제프 호너섹을 원했다. 필 잭슨 감독의 트라이앵글 오펜스에 호너섹 같이 움직임 좋고 슛 좋은 선수가 적격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이는 단장이 거절했다. (호너섹은 이후 유타 재즈로 트레이드 되었고, 1997년과 1998년에 파이널 진출을 도왔다.)


데니스 로드맨은?

‘천하의 악몽’ 데니스 로드맨은 시카고에서도 3시즌 연속 리바운드 1위를 차지하며 자신의 실력을 과시했다. 1995-1996시즌에는 올-디펜시브 퍼스트팀에도 선발됐다.

사실, 시카고가 로드맨을 영입할 당시 주변에서는 너무 일방적인 트레이드라는 평가가 많았다. 로드맨 영입을 위해 팀이 내준 실질적 전력은 평균 10점도 못 넣는 센터 윌 퍼듀 1명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샌안토니오 입장에서도 반드시 내쫓아야 할 선수였기에, ‘오죽했으면’ 그런 트레이드를 수락했을까도 싶다. 게다가 샌안토니오는 로드맨을 내준 뒤에도 1995-1996시즌에 59승(23패)을 거두었다.

그러나 시카고가 로드맨을 영입한 것은 어디까지나 “파워포워드 보강이 필요하다”는 조던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디키 심킨스, 코리 블런트 등 젊은 포워드들로는 타이틀 획득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만일 조던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굳이 폭탄과도 같은 로드맨을 영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로드맨은 어떤 행보를 걷게 됐을까. 윌 퍼듀를 영입해서라도 내쫓고 싶었던 선수였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샌안토니오와는 결별했을 것이다.

다만 그를 통제할 만한 팀이 있었을 지는 의문이다. 시카고를 떠난 뒤 LA 레이커스와 댈러스 매버릭스를 거쳤지만, 계속 사고가 뒤따랐다. 능글맞기로 유명한 샤킬 오닐조차도 로드맨 통제가 안 됐으니 말이다. 로드맨은 레이커스에서 23경기 만에 방출됐고, 이후 댈러스에서도 12경기 만에 쫓겨났다. 12경기를 뛰면서 2번 퇴장을 당했고 테크니컬 파울도 6개나 받았다.


시카고의 전력은 어땠을까

결국 최후의 승자는 크라우스 단장이 됐을 것이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했을 것이란 의미다. 1998년 조던 은퇴 후 그랬듯 말이다.

3연패에 도전하던 1997-1998시즌까지도 필 잭슨 감독은 크라우스 단장과의 기 싸움에서 밀리고 있었고, 그 무렵에는 피펜도 다시 트레이드를 요청했을 정도로 분위기가 엉망이었다. 결국, 잭슨 감독 역시 팀을 떠났을 것이다. 실제로 필 잭슨은 90년대 중후반부터 친정팀인 뉴욕 닉스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오퍼가 많았다.

떠나고 싶어하는 이들의 마음을 그래도 ‘한 팀’으로 엮은 것은 어디까지나 조던-피펜을 중심으로 형성된 ‘다시 우승하자’ 분위기였다. 조던 역시 피펜이나 필 잭슨 감독 없이는 시카고와 계약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반대로 생각한다면 잭슨 감독이 팀을 떠났다면, 조던이 복귀를 고려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포스트-시카고 불스의 행보는 토니 쿠코치, 론 하퍼 등이 남은 1998-1999시즌을 보면 알 수 있다. 1997-1998시즌 이후 우승 주역들이 일제히 떠난 가운데, 시카고는 50경기 단축시즌에서 13승 37패에 그쳤다. 올 시즌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르브론 제임스가 떠나고 난 뒤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만큼이나 처참했다.

대학 감독 출신인 팀 플로이드 감독은 ‘크라우스의 낙하산’이라는 오명을 썼으며, 지도자로서도 팀을 장악하지 못했다. (《시카고 트리뷴》은 플로이드 감독과 크라우스가 친한 사이였지만, 해고될 당시에는 마주쳐도 인사조차 안 할 정도로 관계가 안 좋았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의 입장에서는 운도 안 따라줬는데, 하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위치에 있던 농구팀의 뒤를 맡았기에 자연스럽게 비교될 수밖에 없었고, 또 하필 직장폐쇄로 몇 개월 간 팀 훈련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NBA 첫 시즌을 치렀기에 뭔가가 이뤄질 리가 없었다. 시카고는 마이애미 히트를 상대로 49점 밖에 넣지 못하는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쉽게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조던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시카고는 좀 더 빨리 바닥을 쳤을 것이다.

‘올해의 식스맨(1996)’ 토니 쿠코치는 출중한 개인기량을 뽐냈던 선수였지만, 수비나 터프함에 있어 한 팀의 에이스가 되기엔 부족하다는 평이었고 실제로 시카고를 떠난 뒤에는 눈에 띄는 활약이 없었다. 2003-2004시즌 밀워키 벅스에서 73경기를 뛴 걸 제외하면 어느 팀에서든 70경기 이상을 소화하지 못했다.

스티브 커의 위상도 바뀌었을 것이다. 주고받은 서신이나, 혹은 취재를 가서 본 스티브 커는 달변가에 주변 인물들과도 잘 융화되는 인물이었다. NBA 감독을 꿈꾸며 글도 쓰고, 해설도 준비했던 그는 분명 은퇴한 뒤에도 좋은 감독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만큼의 대중적인 위상을 누렸을 지는 의문이다.

스티브 커는 현역시절 정확한 슛 성공률을 자랑했다. 마이클 조던이 복귀하지 않았더라도 이는 변함없었을 것이다. 성공률 50%는 아무나 기록하는 것이 아니니까.

다만 시카고의 3년 연속 우승 과정에서 승부처 ‘빅 샷’을 터트리고, 때로는 조던의 대변인 아닌 대변인 역할까지 해내면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끌어올린 면도 있다. 본인이 샌안토니오에서 그렉 포포비치 감독을 보좌하며 열의를 보이는 등 성실한 생활을 했기에 분명 좋은 자리를 맡았겠지만, 지금 같은 인지도를 갖진 못했을 것이다.

제리 크라우스 전 단장(왼쪽)과 팀 플로이드 감독


에어조던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농구화 시장을 바꿔놓은 에어조던 시리즈는 여전히 발매될 때마다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특히 인기 작품의 레트로 모델은 인증샷을 안 남기면 서운할 정도이며, 다른 선수들의 시그니쳐 모델을 능가하는 판매량을 자랑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에어조던 11 브레드(BRED)다. 1995-1996시즌 플레이오프에서 신었던 농구화로, 역대 에어조던 중 가장 인기있는 모델이기도 하다.

농구화를 디자인한 팅커 헷필드는 조던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이 농구화를 디자인했다는 후문.

비주얼이 워낙 좋아 조던이 직접 신고 뛰지 않았어도 히트를 치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 뒤 나올 에어조던의 상징성도 오늘날처럼 유지될 수 있었을까는 의문이다. 결국 조던의 시그니쳐 모델이었던 만큼, 본인이 직접 신고 뛰었기에 그만큼 상징성과 스토리가 더해졌던 것이니 말이다.

또한 러셀 웨스트브룩과 자이언 윌리엄슨이 간판 계보를 이어가는 ‘조던 브랜드’ 역시 성장 동력을 잃었을 것이다. 한편 한 농구화 전문 칼럼니스트는 오늘날 슈퍼스타들의 ‘기본 옵션’처럼 여겨진 시그니쳐 농구화 산업도 바뀌었을 것이라 봤다. 이미 조던의 뒤를 이어 찰스 바클리, 샤킬 오닐, 페니 하더웨이 등이 자신의 모델을 갖긴 했지만, ‘아이콘’이 남긴 첫 임팩트가 감소되지 않았을까 싶다.


라이벌에 끼친 영향

조던과 함께 한 시카고는 파이널 시리즈 승률이 100%다. 이로 인해 찰스 바클리, 클라이드 드렉슬러, 칼 말론, 존 스탁턴, 게리 페이튼 등이 울었다. 드렉슬러와 페이튼은 훗날 다른 팀에서 우승을 맛보긴 했지만 프랜차이즈를 이끄는 주역으로서는 조던에게 가로막혀 고개를 떨어뜨렸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조던 없는 시카고가 1990년대에 추가로 NBA 파이널에 올랐을 확률은 극히 떨어진다.

알론조 모닝이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했던 것처럼, 한 팀의 살림을 송두리째 뒤흔들 스타를 영입한 것이라면 모를까 말이다. 그러나 1994-1995시즌 시카고의 뎁쓰를 봤을 때 그 정도 인물을 얻기 위해서는 최소 피펜을 희생해야 했을 것이다. 쿠코치는 크라우스의 최애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크라우스 단장은 자신이 뽑아서 키우는 것, 그래서 ‘업적’을 만드는 것을 더 선호했다. 팻 라일리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 버튼을 누르는 모험가형 사업가였다면 크라우스는 정반대 성향이었기에 다시 팀을 궤도에 올리는 데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대신 1994년과 1995년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휴스턴 로케츠처럼 새로운 팀들이 정상을 지배하는 춘추전국시대가 열렸을 가능성이 높다.

동부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와 마이애미가 막강했다.

래리 버드 감독이 이끌던 인디애나 페이서스는 1997-1998시즌 58승, 1998-1999시즌 33승(승률 66.0%) 등으로 꾸준한 성장세를 보였다. 1998년 NBA 플레이오프에서는 시카고를 7차전까지 끌고가며 괴롭히기도 했다. 데일 데이비스-안토니오 데이비스-릭 스미츠의 높이에, 레지 밀러의 슈팅 등 서부 강호에 대항할 전력도 충분했다. 어시스트 1위(11.4개)의 마크 잭슨도 빼놓을 수 없다.

알론조 모닝-팀 하더웨이를 앞세운 마이애미는 1996-1997시즌 61승, 1997-1998시즌 55승을 거둔 강호였다. 팻 라일리 감독의 색깔이 그대로 투영된 터프가이 집단이었다. 특히 1996-1997시즌 88.9실점은 리그 3위였고, 시카고 불스와도 2승 2패 호각을 이루었다. 다만 이 팀은 플레이오프에서 뉴욕 닉스와 뜨거운 불장난을 치면서 갖고 있는 전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이는 닉스도 마찬가지.

서부에서는 2년 연속 파이널에 올랐던 ‘메일 맨’ 칼 말론-존 스탁턴 콤비의 유타 재즈가 유력했을 것이다.

유타는 2시즌 연속 60승 이상을 기록했으며, 특히 1997-1998시즌에는 애틀랜타 호크스, 시카고 불스, 뉴욕 닉스 등에게 2전 전승, 인디애나와 마이애미 등과도 1승 1패를 호각을 이루었다. 또 홈 코트 어드밴티지를 얻은 상황이었기에 많이 유리했을 것이다. 만일 조던이 없었다면, 무관의 제왕 딱지를 뗄 확률이 높아지지 않았을까.

다만 샌안토니오는 1996-1997시즌에 데이비드 로빈슨이 시즌아웃급 부상을 입고 부득이하게 한 시즌을 날렸고, 1997-1998시즌은 팀 던컨 가세로 재정비가 되는 시점이었기에 이른 면이 있었다.




농구 그 자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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